3.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니까.

RNP ::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니까.


 

"으음, 좋아. 거기, 그렇, 치이.."

작은 침실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의 햇살은 살구빛 커튼을 타고 넘어와, 방 전체를 은은한 살구빛으로 물들인다. 그 방의 한 쪽, 혼자 쓰기엔 크고 둘이 쓰기엔 작은 미묘한 크기의 침대위에 상체를 드러낸 여인이 화려하게 웨이브진 적갈색의 머리칼을 흩트린 채 엎드려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탄 레몬블론드의 소년. 소년은 여인의 뒤에 올라타 여인의 나신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렇지, 하아아, 좋아. 응., 좀 더, 조금 더 아래로.."

소년이 여인의 몸을 만질 때마다 여인은 몸을 비틀며 격렬하게 반응했고, 소년은 그런 여인의 주문에 따라 손을 움직이고만 있었다. 소년의 손은 섬세하고 부드럽게 움직이지만, 그 손가락의 끝은 미묘한 힘이 들어가있었다. 소년의 손이 보다 아래를 쓰다듬는다.

"거기, 거기야.. 세게, 더 세.. 아, 아파.."

요동치는 여인의 머리칼이 그 통각을 대변하는 것이리라. 여인은 활처럼 등을 구부린 채 주먹을 쥐며 고통을 참고 있었다. 천연의 조명 탓일까, 아니면 과도하게 움직이느라 숨을 참은 탓일까. 옅은 금발의 끝자락이 달아오른 소년의 젖은 뺨에 달라붙는다. 붉은 숨을 토하는 소년의 손 끝이 뻣뻣해지고, 보다 강한 힘이 여인의 몸에 전해진다.

"아, 아하앗, 좋아, 응, 더, 더.. 하읏, 하.. 우으으.."

여인의 들어올려진 발과, 그 발의 발가락 끝이 파르르 떨린다. 손 끝이 고양이처럼 휘어지며 침대 시트를 쥐어뜯는다. 그렇게 경렬하던 여인은 이내 폐 속 깊은 곳에서부터 참아내었던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 몸을 맡긴다. 여인의 몸에서 손을 뗀 소년이 침대 아래로 내려간다. 여인은 새하얀 베게에 파묻은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검지로 침대를 톡, 톡, 두드린다.

소년은 말없이 침대로 올라가 여인의 옆에 몸을 뉘인다. 침대를 타고 그 반동이 여인의 몸에 전해진다. 여인은 손을 뻗어 소년의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는다. 수고했어. 나날이 실력이 느는 것이 기쁘다. 여인은 그렇게 소년에게 말했고, 소년은 달아올랐던 얼굴이 다시끔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여인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케이스를 꺼낸 뒤, 그것을 열어 담배를 빼어 문다. 아지랑이같은 주홍불꽃이 담배 끝에서 아른거린다. 맨발의 여인은 주머니에 손을 꽂고 목을 비틀어 풀며 방 문을 나선다. 침대에 누워 새벽의 일을 떠올리는 소년의 귓가에 여인의 중얼거림이 들려온다.

"역시, 제자는 안마를 가르쳐야해."



발 끝으로 차가운 대리석의 촉감이 전해진다. 하지만 그런 것을 느끼는 것은 사치이리라. 세갈래의 길 중 가운데를 택하여 걷던 순간 벽이 허물어지며 두명의 탄탄한 근육질을 가진 사내들이 나타났지만, 그들을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문제는, 그 허물어진 벽 너머의 제단에 있었다. 단상에 올려져 있는 황금의 단도. 교황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신도라면 누구나 받게되는 물건이지만, 소년은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하사되었던 단도라는 것을.

소년의 마음을 읽는 것은 스승에게는 손쉬운 일이었다. 스승은 턱을 치켜들어 제단을 흘겨본 뒤 그 곳을 향해 걸어갔다. 주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스승은 제단위의 단도를 들어본 뒤 관심없다는 투로 소년을 향해 던져주었다. 소년은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단도는 누군가에 의해 용접되어있었다는 사실을. 스승이 소년을 지나 다섯걸음 쯤 걸었을 때에야 소년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를 악문 소년의 눈빛이 변한 것을 본 스승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스승은 천천히 소년의 뒤를 따라 걸었다.

복도를 걷던 스승의 눈썹이 올라갔다 내려온다. 익숙한 길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교황청의 구조를 떠올린 스승은 손목을 풀기 시작했다. 천천히 걸으면서 발목을 풀어주고, 무스탕의 안쪽에 준비해두었던 물품들을 확인한다. 토카레프의 예비탄창은 이미 사용했고, 델린져의 탄창은 가지고 오지도 않았다. 단신으로 교황청에 침투하는 것 치고는 빈약한 장비인 듯도 싶지만 애초부터 그녀에겐 그런 무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믿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영혼 뿐.

스으윽, 소년이 손을 대자 거대한 문이 소리 없이 열린다. 준비하고 있었던 것일까. 소년과 스승의 눈 앞에 압도적인 크기의 홀이 나타났다. 적어도 5,6백명은 거뜬히 수용할 수 있을 법한 거대한 홀. 그리고, 진짜로 3백명쯤 되는 새하얀 성의의 사내들이 그 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배교자, 처단하겠다!"

가장 뒤에 서있는 거대한 사내가 소리쳤다. 스승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풀기만 한다. 맨 앞의 사내들이 달려오기 시작한다. 가장먼저 달려온 사내의 턱에 깔끔한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날린 스승은 왼쪽의 사내를 향해 스텝 인 사이드킥을, 발을 거두지도 않은 채 우측의 사내에게 상단차기를 먹임과 동시에 사내의 목을 지지대 삼아 공중으로 몸을 띄워 전후의 사내들의 얼굴을 양 발로 가격한다. 한순간에 다섯명의 사내들이 무력화되었지만 압도적인 숫자의 군중이 뿜어내는 군중의 열기는 사내들의 이성을 흐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느새 스승과 소년의 주위를 둘러싼 사내들이 몽둥이와 단도를 앞세워 달려오기 시작했다. 스승의 화려한 머리칼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뒤쪽의 사내에게 백스핀 블로우, 한걸음 들어가며 좌측의 사내에게 엘보스윙, 그 회전력을 이용한 뒤후리기가 그 옆의 두 사내를 가격한다. 회전은 멈추지 않은 채 반대쪽의 발 뒷꿈치가 그 좌측에서 덤벼들던 사내의 턱을 부수고, 타격의 반동을 이용한 역회전이 공중 뒤돌려차기의 위력을 배가 시킨다. 빠른 원투에 이은 로킥, 스텝을 이용한 팔꿈치 지르기에 이은 숏 어퍼, 날아오는 몽둥이를 손으로 빗겨내며 훅을 날리고 떨어진 단도를 주워 뒤쪽에서 달려오는 사내에게 던진다. 순식간에 수십의 사내들이 쓰러져나간다. 이미 스승과 소년의 주위는 성의를 입은 사내들의 시체로 - 전부 죽은 것은 아니겠지만 -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절반이상이 남아있었고, 그들의 얼굴은 두려움보다는 광기가 더욱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쓰러진 동료를 밟으며 달려오는 사내들. 아마도 살아있던 사내들은 동료에 의해 죽게 될 것이리라. 스승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담배끝의 주홍불꽃이 짙어진다.

스으으-

스승의 오른발이 무겁게 들어올려진다. 열을 맞추어 달려오는 상대라면 모를까, 이렇게 난잡하게 산개하여 달려오는 적에겐 직선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을 터. 소년은 스승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스승의 담배 끝에 걸린 주홍불꽃의 색이 점점 짙어지고, 발 밑의 대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우레소리가 홀을 진동한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기둥과 천장의 이음새에서 돌가루가 부서져내린다. 스승의 발은 자신의 앞을 강하게 내리찍었고, 대기의 진동이 멎는 순간 스승의 담배가 터져나갔다. 그리고 불꽃의 대향연이 시작되었다.
대리석 바닥이 균열하며 주홍색의 폭염이 솟구친다. 그것은 마치, 별의 태초를 보는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산발적인 폭발이 대리석 바닥을 부수고는 사내들을 삼키며 포효한다. 폭발에서 빗겨나간 운좋은 사내들은 깨진 대리석 조각의 축복을 전신으로 받는다. 폭음과 사내들의 고함소리가 뒤섞인 홀은 전장과도 같았다. 담배의 필터를 뱉어내고 새 담배를 꺼내어 무는 스승이 왼손을 들어올려 얼굴을 가린다.

꽈득, 날카로운 소리가 폭음이 가신 홀을 울린다. 맨 뒤에 있었던 거대한 사내가 몸 곳곳에 깨진 대리석 조각을 박은 채 달려와 일격을 날린다. 그 일격에 스승의 왼팔이 부러진 듯,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강한 통증을 동반한다. 사내는 분노의 눈빛을 더욱 흉흉히 빛내며 반대쪽 손을 휘두르지만 스승은 몸을 숙여 그 공격을 피해내고는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린다. 왼팔과 오른 발의 뼈가 모두 부러진 기분. 하지만 스승은 그 것보다도 땅에 떨어진 담배가 아쉬운 눈빛이었다. 그 시선을 눈치채었는지 사내가 거친 걸음으로 달려온다. 스승은 눈을 가늘게 뜨며 담배의 옆에 떨어져있는 단도를 오른손으로 잡아던진다. 사내의 오른 허벅지에 단도가 박히지만 사내는 아랑곳 하지 않고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달려온다. 스승은 그 옆의 대리석 조각을 쥐어 던지지만, 박히기는 커녕, 사내의 몸에 맞아 부서질 뿐이었다. 스승은 한숨을 쉬며 몸을 낮춘 뒤 왼발을 축으로 몸을 뻗어 달려오는 사내의 하복부에 체중을 실은 일격을 날린다.
직격인가, 사내의 몸이 경직된다. 스승은 왼발에 힘을 주어 부서진 오른 발을 끌며 몸을 세운 뒤 군데군데 찢어진 무스탕을 털어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순간 사내의 오른 손이 휘둘러진다!

"스승님!"

쾅! 스승이 어지러진 홀의 한쪽 구석으로 쳐박힌다. 화려한 적갈색의 머리 사이로 피가 흘러내린다. 새하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체를 물들인다. 소년이 발에 채이는 대리석 조각을 들고 달려가 사내의 허리를 강타하지만, 사내는 귀찮은 듯 손을 휘들러 소년을 내칠 뿐이었다. 소년은 바닥에 뒹구는 몸을 추스르며 이를 문다. 다시 손에 잡히는 것을 쥐며 달려나가 사내의 몸을 가격하지만 마찬가지의 결과. 바닥에 머리를 부딪혀 피를 흘리는 소년은 자신의 무력함이 한탄스럽기만 했다. 눈물을 흘리는 소년의 눈에 흘러내린 피가 스며들어 얼굴을, 눈가를 타고 흘러내린다. 흐려진 소년의 시야에 절룩거리며 스승에게 다가가는 사내의 모습이 보인다. 피와 눈물이 뒤섞인 소년의 호박빛 눈동자에서 황금의 광채가 번쩍인다.

소년의 단도에서 주홍의 불꽃이 피어오른다. 수많은 신도들의 기도가 담긴 성스러운 단도. 지금 소년은 신의 대행자를 향해 분노를 피어올리지만, 성검은 그 의지에 동조하듯 성화를 피어올린다. 소년은 단도의 검집을 빼내어 던졌다.

어느 것이 신이고, 어느 것이 정의란 말인가.

소년은 피눈물을 뿌리며 자신의 스승에게 손을 뻗는 사내를 향해 달려갔다. 사내의 분노와 탐욕이 가득한, 하품의 타르와도 같은 눈빛으로 스승의 무스탕 앞자락을 거칠게 쥐어뜯는 모습이 소년의 눈에 가득하다. 소년의 뜀걸음이 빨라진다.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달린다. 사내가 연옥과도 같은 입속에서 끈적이는 혀를 내밀어 스승의 턱아래 목을 잡아서 들어올린다. 그 선홍의 살덩이가 스승의 얼굴에 다가가는 순간, 사내의 동공이 확대된다. 사내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아래를 바라본다. 소년의 단도가 사내의 왼 무릎을 파고들었다. 사내는 분노하며 스승을 잡은 손의 반대손으로 소년의 머리를 내려친다. 죽음을 마주할 듯한 충격이 소년의 머리를 울린다. 하지만 소년은 손에 쥔 단도를 놓지 않는다. 피어올라라, 성화여. 업을 정화하는 성스러운 주홍의 불꽃이여. 피어올라라, 피어올라라!

"흐아아아악-"
주홍의 불꽃이 사내의 몸통을 잠식한다. 사내는 스승을 쥔 손을 놓고 엉덩방아를 찧은 채 뒷걸음질하며 새된 소리로 비명을 지른다. 몸을 잠식하는 정화의 불꽃이 그의 몸을 태우고 있었다.

"사, 살려줘! 여, 여보! 따, 딸이 있.. 흐아악, 살려줘! 주.."
소년은 손에 쥔 단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가 주저앉으면서 칼날이 부러져 나갔다. 사내의 비명소리를 들은 소년은 멍한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절망하고, 절규하며 구원을 바라던 사내의 외침. 소년은 조금 전에 생겨난 물음을 떠올렸다. 모든 것이 허무했다. 무엇을 위하여 신을 찾고, 사마와 싸우는 것인가. 소년의 눈속에서 영원의 황금빛으로 타오르던 불꽃이 사그러진다. 텅빈 눈으로 재가 된 사내를 바라본 소년은 멍하니 주저앉아 있을 뿐이었다.


빠악, 소년의 뒷통수를 강타하는 흰 손바닥. 소년은 멀어지던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뒤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상의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앞치마만을 걸친 스승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스승의 담배끝에서 피어오르는 주홍의 불꽃을, 그 무심한 눈빛을 바라보던 소년은 스승의 손이 다시 올라가는 것을 보며 스승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함박웃음을 띄며 스승의 허리를 감싸안는다. 어이가 없다, 라고 한가득 쓰여있는 얼굴의 스승은 피식 웃음지으며 들어올렸던 손으로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스승의 부드러운 체향속에서 소년은 그 날 자신의 스승이 해준 말을 떠올렸다.


"울때엔 울어, 피를 토할듯이. 그리고 피를 토해내며 소리쳐.
그게,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싸워."

by 朗滿 | 2008/10/09 01:44 | :: RNP ::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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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푸른태초 at 2008/10/09 06:43
오래간만에 보는 글이네요.
요즘엔 어찌 지내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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